2009년 05월 08일
낭만이의 경륜
낭만이는 경험이 많은 개가 아니다. 이 개가 겪는 일은 주인의 눈치를 보며 집안에 머무는 것이 전부다.
아주 전부는 아니다. 개는 종종 산책을 나서자고 조른다. 평소 실내에 용변을 보지 않는 개가 기특한 주인은 개의 그런 신호를 고맙게 여기기로 한다. 수캐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수캐와 함께 다녀본 사람은 알 것이다. 개는 조금씩 나아가며 자기 영역을 표시한다. 남성 호르몬이 오줌에 실려 길 구석구석에 남는 것이다. 그 길을 지나는 다른 개들이 거기에 자신의 남성을 덧씌운다. 개들이 다니는 길은 호르몬 전쟁터다.
일년 전 이 녀석을 거세시켰을 때 나는 녀석이 길 구석에 다리를 들고 오줌 뿌릴 일은 이제 없겠구나 기대했다. 그러나 수의사 선생이 말하기를,
“습관은 없어지지 않을 거에요응? 다 큰 애들은 이미 길이 들어서 어쩔 수 없어요응? 살이 좀 찔 거야응?”
과연 낭만이는 살이 좀 붙는가 싶었고, 여전히 오줌을 뿌리느라 이 모퉁이 저 모퉁이를 부산하게 다닌다. 나는 그 위에다 오줌을 덧뿌릴 다른 수캐들을 생각해보았다. 오줌이긴 한데, 뭐지, 이건? 낭만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맑은 오줌을 뿌리기 바쁘다. 생존이나 번식 전략상 무의미한 오줌을.
바깥에서 개를 끌고 다니면, ‘안 된다’고 신호해야 할 일 투성이다. 낭만이의 경험 대부분은 그래선 안 될 경우임에도 본능적으로 움직여서 당하게 되는 주인의 압박이다. 나는 사냥터나 목장 아닌 데서 개가 얼마나 불행할지 상상해본다. 불행은 다른 게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감각이 차단되는 운명 그 자체다.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맘에 드는 상대를 만나도 끽 소리하지 않고 얌전히 지나쳐야 하는 운명과 흡사하다. 나에게도 주인이 있다면 아마 감당 못할 여자에게 영역을 표시하고 싶을 때마다 목줄을 끌어당겨 주었겠지. 스스로 내 목줄을 당기는 수밖에 없다.
불후의 명성을 남기고 죽은 어떤 예술가가 인생의 말미에 ‘연애를, 연애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지. 나는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남겼다는 사실을 높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러 들어보았다. 그들은 목줄이 죄어 옴에 따라 영역을 더 표시할 수 없는 인생이 서글프다고 말한다. 이런저런 계산으로 인해 더는 순수하게 사랑할 수 없는 세태가 서글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찬탄해 마지 않는 ‘연애를! 한 번 더 연애를’ 이라는 유언이 왕의 것임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불후의 걸작들을 많이 남긴 그는 애인에게 믿음직할 수 있었던, 왕이었다. 그는 거세를 당하지도 않았고, 거세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로 죽음을 맞이하지도 않았다. 그의 오줌은 탁했다.
그렇다고 내가, 거세당했음에도 여전히 영역을 표시하는 낭만이의 목줄을 죌 필요는 없다. 그곳들은 그저 길목일 뿐이므로. 내 허락 하에 낭만이는 길과 연애한다. 그럴 필요라곤 없지만, 그게 그 녀석의 경륜이다.
다른 주인들처럼 다른 경험을 반복시켜 다른 경륜이 쌓이도록 애써줄 수도 있을 것이다. 신호에 맞추어 점프하거나, 던지는 건 무엇이건 물어오거나.
근데 난 왜 그런 게 한결같이 알량해 보이지? 거세당한 남자의 소비적 취향과 기술 연마, 자기개발. 혹시 이런 것들이 숭고함을 내가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안 그래도 개가 집에서 서서히 늙어가는 마당에, 나는 녀석이 좀 더 얌전해지길 바란다. 저 활기찬 젊음이 실내에선 하등 쓸모가 없음을 종종 귀에다 대고 소리쳐주고 싶다. 큰 개들의 통행이 금지된 이 세계에서 개들을 풀어놓기보다 그게 훨씬 효율적임을 개 주인들은 잘 안다. 그게 낭만이 쌓아야 할 경륜이다.
# by | 2009/05/08 06:29 | 낭만적 견해 | 트랙백 | 덧글(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