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와 만났다.

Y는 좀처럼 연락하지 않는 대학 동기들 가운데 뜸하게나마 연락할 염이 돋는 친구다. 그는 스무 살 가을이었을 어느 날 고속터미널에서 개포동으로 가는 버스에 나와 함께 올라 타서는 버스 손잡이 사이로 열변을 토했(었)다. 아마도 710번이었을 그 버스에서 그는 내가 가진 편협한 사고방식을 문제삼고 비아냥거렸다. 완곡어법에 가정법을 즐겨 쓰는 그의 말투는 번역투처럼 들릴 때가 많았다. 나는 그 현란함이 좋았다. 비록 그 언변에 의해 내 종교적 신념체계가 흔들리는 것이 괴롭기는 했으나. 그는 나더러 차라리 조로아스터교를 믿으라고 했다. 그 편이 기독교도로 사는 것보다는 덜 모순적일 것이라면서. 나는 그 말의 맥락을 위아래앞뒤 할 것 없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Y가 썼던 글들이 토막토막 떠오른다. 그는 착실하고 꼼꼼하게 쓰기를 좋아했는데, 쓰고 보면 능글맞은 농담일 때가 많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게 농담인지 모르는 듯했다. 오 년 전쯤, 그가 쓴 것을 마지막으로 보고 나서, 그가 애초부터 농담조엔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울리지 않는 직장에 다녔고, 어울리지 않게도 영업과 상품기획을 했다. 그가 보내온 ppt와 메일을 보고 영 낯설던 기분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Y는 여전히 담배 연기를 싫어했다. 커피를 함께 마시며 서로 불편하지 않을 곳을 찾느라 삼성역 주변을 돌고 또 돌았다. 가게들마다 해프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까지 모자라지 않던 커피가 하필 우리가 들어서기로 한 그 시각에 다 떨어졌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맘에 들 거라며 데려간 카페 테라스에선 바람이 불지 않아 나와야 했다. 우리는 만난 지 두 시간쯤 지나서야 공사벽이 둘러쳐진 골목의 습기찬 테라스에 앉았다. 담배에 불을 붙일 때마다 풍향을 감안해 자리를 바꾸어 앉아야 했다.

우리는 서로 요즘 무엇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런 얘긴 할 필요가 없었다. 있다 해도, 나중에 호기심을 살짝 풀어줄 정도로만 하면 되었다. 우린 Y의 가방 속에 있던 책의 저자가 얼마나 부주의하게 책을 썼는가에 대해 얘기했다. 문단과 문장을 손가락으로 직접 짚어가면서. 결론은, 저자가 박학무식하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과학, 그 중에서도 특수상대성이론이나 진화론에 대해서.

우리는 과학에 대해 얘기했고, 자유에 대해 얘기했다. 남들과는 그렇게 불편했던 얘기가, 이 친구와는 즐겁다. Y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가 과학에 아주 무지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과학이 우릴 바꿔놓았고, 수 년 내에 다른 사람들 역시 그러할 것이다. 뉴런 단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농담조로 기술하는 그런 세상. 그런 세상이 오기 전에 몇 가지 농담들을 선점하는 것 말고는 당장 다른 욕심이 없다고 했던가, 그는? 그는 그런 ‘소설가’로 한국에서는 정영문이 최고였다고 했고, 쿤데라를 빌어 그가 생각하는 ‘작가’의 개념이 무엇인지 설명하고자 했다. 나는 화학이나 수학을 공부해보고 싶다고 맞장구쳤다. 그러자 그는 친절하게도 내 노트에, 화학을 비롯한 다른 분야의 교양입문서로 적절한 책들을 적어주었다. 왜 하필 화학이냐구? 그야 외계물질을 다루어야 하니까. 나는 다른 물질적 조건에서 진화한 생물체가 이성의 엉덩이를 욕망한다면 그게 어떤 기분일까 궁금한지 몇 년은 되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화학 지식이 는다든가, 돌고래나 개미 말고 다른 종에 대해 귀 기울여 보았다든가 하는 일 말이다. 어쨌거나 다른 ‘종’의 욕망체계가 어느 정도 손에 잡히고 나면? 그땐 그 욕망이 작렬하는 그 세계 대도시의 기호체계를 생각해봐야겠지. 그들이나 우리나, 자유의 문제는 딜레마일 것이다.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나 우리나 선택한 적이라고는 없는 이상한 딜레마 말이다.

우리가 테드 창에 대해 얘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린 우리대로 자유에 대해 생각해 온 것이 있었다. Y의 물음에 나는 자유의 반대말이 이해일 거라고 대답했다. 자유는 3차원적인 문제다. 시간이 흘러야 선택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는 그렇지가 않거든. 이게 ‘당신 인생 이야기’의 주제였다. 내가 알기론.

자리를 뜨면서 우리는 좀 더 자주 만날 것을 다짐했다. Y가 정영문이 어떤 소설을 썼는지 설명해주는 바람에, 왜 Y가 버스를 타지 않고 지하철을 타겠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나눌 말이 있었다. 정영문이란 소설가는 그런 일에 정당한 이유 따윈 없음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그래, Y. 왜가 아니라 어떻게가 필요한 거겠지, 언제나. 그래서 우리의 위안은 이렇게 뒤늦은 걸까?

by 기린꿈속 | 2009/08/01 19:20 | 내가나에대해하는말을 믿다니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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